愚 石 漫 錄

裕堂 崔相玉 紀績碑 (유당 최상옥 기적비)

살메기 2010. 1. 11. 15:42

유당 최상옥 기적비
裕堂 崔相玉 紀績碑


<碑 文>

夫彰善稱美國家之所嘉尙士
儒之所當務苟有善行美德之人
則豈可不彰之稱之以勸懲於來
後耶崔斯文相玉全州人寶文閣
大提學晩六瀁後瑞南允鳳子少而貧窮無爲早投身土建業卒能致巨○則
若驕矜自滿以快耳目身體所娛而惟謙恭勤儉事父母備極安樂奉祖先盡
誠力以至興學育英地域繁榮之地優例而奬之出義而捐之者不○多多矣
惟吾敦仁齋往昔改築而體製未免苟且屢欲重建而財源艱難故士林之齎
恨久矣斯文特有意於此獨捐出巨額以復舊增大其棟宇之輪奐瓦○之完
美制度之縝密寔不失爲校宮敦仁齋之貌則善行美德孰不讚美將與齋共
○嶸以不朽於百世矣鄕議齊發將伐珉紀實徵余以陰記觀感攸極不敢以
不文辭樂爲之書
壬戌七月 日
全州 李鎭白 撰 信川 康仁煥 書
和順鄕校 典校 崔泳鶴 總務 裵祺淞
掌議 林魯煥 鄭宗杓 曺其煥 張炳琸 崔炳玉
曺淵爀 李鎭白 李應杓 李○○


<번역문>

무릇 선(善)을 표창하고 미(美)를 칭찬한 것은 국가(國家)에서 가상히 여긴바요.
유림(儒林)이 마땅히 힘쓴바이니 진실로 선행(善行)과 미덕(美德)이 갖춘 사람이 있으면 어찌 가(可)히 표창하고 칭찬하여 후세를 권장하고 징계하지 아니하리요.
최사문(崔斯文) 상옥(相玉)은 전주인(全州人)이니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 만육(晩六) 휘량(諱瀁)의 후요. 서남(瑞南) 윤봉(允鳳)의 자(子)이다.
젊어서 빈곤하여 할길이 없어 일찍 토건업계(土建業界)에 투신(投身)하여 마침내 능히 큰 재산을 이루었다.
교만하고 인색하여 자부하여 자기의 이목(耳目)이나 신체(身體)의 즐길바를 상케이 하고자 할것이로데 오직 겸공(謙恭)하고 근검(勤儉)하며 부모(父母)를 섬기매 안락(安樂)을 갖추어 극진히 여겼다.
조상(祖上)을 받들매 성력(誠力)을 다하며 학교(學校)를 일으키고 영재(英才)를 기르며 지역(地域) 번영한데 이르러 넉넉한 예(例)로 권장하고 의연금(義捐金)을 낸것이 다대(多大)하였다.
오직 우리 돈인재(敦仁齋)는 옛적에 개축하였으나 체제(體制)가 구차함을 면치 못하니 누차 중건(重建)하고자 하였으나 재원(財源)이 가난함으로 사림(士林)들이 한탄해온지 오래러니
사문(斯文)이 특별히 이에 뜻이 있어 홀로 거액을 연출하여 증대하게 복원(復元)하니 그 마루대와 처마의 장대하고 화려함과 기와의 완미(完美)함과 제도(制度)의 치밀한 것이 진실로 교궁(校宮)의 돈인재(敦仁齋) 모습을 잃지 아니한즉 그 선행(善行)과 미덕(美德)을 뉘 찬미하지 않겠는가.
장차 돈인재(敦仁齋)로 더불어 함께 높아 백세(百世)토록 썩지 않으리라. 향유(鄕儒)의 의논이 재발하여 장차 돈을 깍아 실적(實績)을 기록할제 나에게 기(記)를 청함에 보고 느낌이 많아 감(敢)히 글을 못한다 사양치 않고 즐겁게 쓰니라.
서기 1982년(임술)7월 일
전주(全州) 이진백(李鎭白) 글을 짓고 신천(信川) 강인환(康仁煥) 글을 썼다.
화순향교 전교 최영학 총무 배기송
장의 임노환 정종표 조기환 장병탁 최병옥 조연혁 이진백 이응표 이동렬
  소재지 화순군 화순읍 교리(향교내)
  건립연대 1982년
  규 모 총높이:1.90m 비높이:1.30m 넓이:0.44m 두께:0.21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