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1950년에 겪은 경인동란(6.25)은 어찌 차마 마음이 아파 언급이나 하겠는가. 동복향교(同福鄕校) 전체가 불타 잿더미가 되었는가 하면 제사에 올린 서직(黍稷)이 익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가 하면 향교(鄕校)에 따른 전답(田畓) 역시 이미 분배(分配)되었다. 선비들이 이를 아쉬워 하는 마음에서 협력하여 겨우 대성전(大成殿)을 창건하고 다만 일년에 한번씩 석전제(釋奠祭)를 올렸으며 빨리 지나가는 세월속에 뜰에는 잡초가 무성하였으니 회헌(晦軒)선생이 이른바 봄풀 가득한 뜰은 적막하여 찾아온 사람 없다고 하신것처럼 불행(不幸)이 이 상황에 가까웠으니 한탄스런 마음 어이 감당할 것인가. 지나간 계해(癸亥 1983)년에 다행하게도 석정(石汀) 김행곤(金行坤)씨가 전교(典校)에 피선되어 취임한지 첫해부터 향교(鄕校)를 옛 모습대로 복원(復元)할것을 결심하였다. 옛날 낙성계(樂聖契)를 부활(復活)하여 성현(聖賢)을 높히고 그리는 정성을 환기시키며 뭇 선비들에게 간곡히 호소를 하였다. 그 결과 일년이 못되어 2천여만원을 모금하여 토지 일천5백여평을 구입해 대제(大祭)를 모실 수 있는 전답으로 삼았으니 진실로 공자(孔子)를 존모(尊慕)하는 정성이 뭇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지 않았다면 어찌 가히 이런 일을 해 냈겠는가. 이 사업에 이어 군(郡)과 도(道)에 백방(百方)으로 교섭하는가 하면 멀리는 중앙 부처(部處)에 까지 교섭을 하여 동제(東齋)인 경모제(敬慕齋)와 서재(西齋)인 양사재(養士齋)를 신축하고 또 사당 앞 내삼문(內三門)과 외삼문(外三門)을 건축하였다. 또한 문화재(文化財)법규에 의해 사방(四方)으로 담장을 수축하고 진입로 포장과 화장실 신축과 상수도 시설에 이르기까지 힘을 쏟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어 충효교실을 실시하여 인의(仁義)의 교육을 강의하고 윤리(倫理)의 도리를 설명하니 글 읽은 소리가 우렁차 공자(孔子)님 행단(杏壇)에 까지 들린듯하였다. 이리하여 향교 모습이 화려하게 새로워져 선비들의 재숙(齋宿)할 곳이 있게 되었고 변두(○豆)등 제기가 매우 새로워 능히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달려가 춘추(春秋)로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아! 무성한 잡초속에 황폐된 향교(文廟)를 잘 수호하고 퇴폐된 유풍(儒風)을 진작(振作)하여 무너져간 이륜(彛倫)을 확실히 붙들었으니 그가 우리 학문(學文) 발전에 기여한 공로와 삼강(三綱) 오상(五常)을 확실히 붙들어 놓은 공로를 이렀다고 설명하겠는가 그 공적과 덕망은 장차 향교와 더불어 존망(存亡)을 같이 하여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성균관(成均館)으로부터 이미 표창이 있었고 공의(公議)가 한결같이 발기(發起)되어 온 지방이 호응 하였으며 서로 더불어 협의한 결과 비석을 갈고 갈아 그 공적을 기록하기로 하였다. 이상규(李商圭) 전교(典校)가 동천(東泉) 이범택(李凡澤)과 더불어 나에게 비문을 간청하기에 나는 이웃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이 확실하다.더구나 남의 선행(善行)을 칭송하기를 즐거워하여야 한다는 도리(道理)에 있어 감히 글 솜씨가 부족하다 하여 사양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록하였다. 1996병자(丙子)년 10월 16일에 전주(全州) 이진백(李鎭白) 글을 엮고 전주(全州) 이규형(李圭珩) 글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