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한나라에서 시작된 것으로 묘비에서 시작되었다.
비의 일종인 갈도 있는데 처음에는 백비 즉 글자를 새기지 않은 비였으나 점차로 죽은자의 공덕을 새기게 되어 비로소 비의 체모를 이루게 되었다.
진나라 이전에는 각석이란 말은 있어도 비란 말은 없었고 비석을 비라고 한것은 한나라에서 시작되었는데 대체로 비신이 장방형으로 된 것을 비라 하고, 자연석의 일면을 갈아서 위를 둥글게 한 것을 갈이라 한다.
비의 모양은 비신과 리수 귀부로 되어 있다.
리수는 비의 갓으로 뿔없는 용을 조각하고 귀부는 비의 기석으로 거북 모양으로 되어 등에 비신을 세우게 되었다.
비신의 전면을 비양, 뒷면을 비음이라 하고 비음에 새긴 비문을 명 또는 음기라고 한다.
비의 종류는 비의 내용에 따라 여러가지로 나누어지나 대체로 순수비, 기적비, 신도비, 능비, 묘비, 정여비, 공덕비, 기념비, 불망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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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비 화순읍 교리 화순향교 경내에 있다. 전주최씨 유당 최상옥이 1982년에 화순향교의 곽인재를 독담 중건하니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유림의 중의로 1982년에 건립하였다. 전주 이진백이 비문을 지었다.
●절부비 화순읍 세량리에 있는 전주 이응걸의 처 진주김씨의 수절비이다. 우귀말기에 부 무고히 동난에 치명하니 나이 겨우 20이다. 유복자를 선육하고 종사를 출승하며 문호를 부립하고 청유수절하니 향당과 부당이 정절을 가상히 여겨 절부비를 건립하였다. 우석 이진백이 비문을 지었다.
●효열비 화순읍 세량리에 있다. 전주 이동화의 처 광산이씨의 비이다. 부군이 기질로 요사하니 가미삼년이라 유고가 강보중에 있는지라 읍혈로 삼상을 마치고 구고를 효봉하고 유고를 무육하여 성립케하고 종사를 계승하게 하였다. 향도천이 있었다. 전주 이진백이 비문을 지었다.
●표리비 청풍면 풍암리에 있다. 전주이씨 현구의 처 진주강씨의 열부비이다. 진주강씨는 부군이 병석에 눕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간호하였으나 약효가 없자 작지하여 연명시켰으나 끝내 운명하였다. 그때 21세였으며 1세인 유고가 있어 근농잠으로 가세를 윤택하게 하였고, 유고 봉우를 성장시켰는데 불행하게도 봉우가 질병으로 위독하자 지혈로 간병하였으나 21세로 요절하였다. 유복남아 있어 무육교육에 전념하였다. 진주강씨는 정숙한 부도를 고수한 몸이라 부정한 말을 들으면 온 몸이 가렵고, 귀가 울고 하여 목욕을 하고 나서야만 가라앉았다는 일화가 있다. 1987년에 이 비를 건립하였다. 전주 이진백이 비문을 지었다.
●효행비 청풍면 풍암리에 있다. 전주이씨 이형호는 성종의 제4남 완원군 수의 11대의 손으로 순종때 모친이 천식으로 백약이 무효하자 의원이 정월의 비둘기가 직효하다는 말을 듣고 그물을 치고 기천하니 수마리가 잡히자 공급시켰더니 완쾌하였고 부친이 후두종기로 신음하자 7년간 환부를 빨아 주어 완치하게 하였다. 1834년(순조34) 11월에 순조가 승피하자 노령을 무릅쓰고 단을 쌓고 상례를 갖추고 곡을 하였고 삭망에 반드시 등단배례 하였다. 향도천상 및 의계포가 있었으나 정표를 얻지 못하였다. 후손 및 유림이 그 충효를 추모하여 건립하였다. 전주 이진백이 비문을 지었다.
●공적비 도곡면 효산리에 있다. 만청 문인식은 도곡면농회장, 도곡면의회 의장을 역임하였고, 교사의 증축 공민학교를 중학교로 승격시켰고, 또 민선면장에 피선되어 농리증진에 기여한 바가 커서 면민이 추진위진념을 구성하여 1986년에 건립하였다. 전주 이진백이 비문을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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