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 장날과 씨름판의 추억
살메기
2018. 2. 1. 08:26
문득 어릴적 백중장날의 추억이 떠오른다.
음력으로 7월15일.... 양력으로는 8월 중하순경 쯤이 된다.
이때쯤이면 무더위도 막바지에 이르러 9월이 다가오고....
논에 벼도 이삭이 패어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시기로,
김매기도 초벌 두벌 세벌매기 까지 다 끝나
벼 추수 때 까지 좀 한숨 돌릴만큼 여유가 있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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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우리 집에도 머슴이 있었다.
아랫동네 양지편에 살던 만뱀이 이 서방이 그였는데....
아버지 연세쯤 되신 분이었다.
1년에 머슴새경 쌀 두가마인가를 받기로 하고 머슴을 살았는데...
어린 나이에도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안마당 바깥마당 길다란 대빗자루로 쓸어내고,
집앞 논두렁에 나가 소 먹일 깔(풀)도 한지게 해서 가지고 온 뒤에
저만치 따로앉아 아침을 들었다.
그리고는 낮에 이것저것 일도하고...
특히 겨울철이면 일과처럼 중요한 일이 동네 뒤산인 살목산에 가서
땔 나무를 한짐 해오는 것이었다.
그 갸날픈 몸으로 족히 100kg이상은 됨직한 산더미 같은
나무를 지고 오는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했었다.
이른 초봄 어느땐가는 나무하러 가는 이서방 아저씨를 따라
살목산에 가서 아저씨가 나무하는 사이에 난 칡을 한뿌리 캤던적도 있었다.
그런 이서방에게 백중날에는 할머니께서 특별히 새 옷을 한 벌 준비해 두었다가
내어주고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용돈도 내어주어
읍내 장터에 가서 맛난거 사먹고 오라고 보내던 기억이 생생하다.
농사일에 한숨돌릴 여유가 있는 시기를 맞아 읍내 장터에 나가
하루 휴일을 즐겁게 보내고 오라는 배려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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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어릴 적 어느 해이던가...
백중 장날인데 읍내 장터에서 황소 한 마리가 걸린 큰 씨름판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난 호기심에 오리 길을 걸어서 구경을 갔다.
광시장터 싸전마당 한가운데에 모래로 둥그렇게 씨름판이 만들어지고
구경꾼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작년에 바라티 사는 김00가 우승했는디 보나마나 올해도 또 김00가 우승할껴..."
해가면서 나름 우승자를 점치기도 하고...
하여튼 이 동네 저 동네에서 힘 좀 쓴다는 젊은 사람들이 모두 모여 씨름판에 나서는데....
어디서 왔는지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 구릿빛 피부를 가진 시골 촌뜨기와는 다르게
피부색이 하얗고 핸섬하며 가슴 근육이 발달한
젊은 청년들 두세명이 씨름판에 나서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도시청년들임을 알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저 사람들 누구랴? 어디서 온 사람들이랴?” 하면서 수군수군 해대고...
누군가는 천안서 왔다는 둥 또 누군가는 예산농고 유도선수들이라는 둥....
한편에서는 “저 허여멀겋게 생긴 넘들이 무슨 힘이나 쓰것남? ”
하면서 얕잡아 보기도 하고...
드디어 씨름판이 벌어졌는데....
깜짝놀랄일이 벌어졌다.
시골에서 농사 지으면서 쌀가마쯤은 번쩍번쩍 든다는 장사라고 소문난
시골청년들 모두가 그 피부색 하얀 도시청년들에게는 어림 반 푼도 안되었다.
요즘말로 잽도 안되는 상대였다.
샅바를 잡자마자 한 번에 나가 떨어지고... 나가 떨어지고...
결국 그 황소임자는 도시에서 온 몇 명중에 키가 큰 청년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은 시골 읍내에서 씨름판이 벌어졌다 하면,
으레히 마사리 김00, 노전리 박00가 1등했다는 등
동네 청년가운데 누군가가 당연히 우승자가 되곤 했는데...
생전 얼굴도 모르는 타지에서 온 젊은 청년들이 우승해서 소를 끌고 갔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도시에서 전문적으로 씨름을 배운
전문 선수들이었지 않을까 싶다.
TV 천하장사 씨름대회에 나오는 그런 사람들...
마치 박종팔이나 유제두 같이 전문적으로 권투를 배운 사람과
시골에서 주먹 좀 쓴다는 촌띄기가 맛붙은 격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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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뱀이 이서방 아저씨도 벌써 돌아가셨을 테고....
이젠 시골에도 집집마다 보일러가 놓아져서 나무를 해다가 땔일도 없어졌고,
머슴이란 말도 아득한 옛날말이 되어버렸다.
집집마다 거의 차가 한대씩 있으니 필요한게 있으면 기다릴 필요 없이,
군청 소재지 큰 상설장으로 20-30분 뚝딱 차몰고 가면되니...
5일마다 북적대던 면 소재지의 5일장도 있는 둥 마는 둥 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