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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선생 후손 대통 후보

살메기 2021. 9. 13. 19:12

蜘蛛網(지주망)거미줄 - 明齋 尹拯 (명재 윤증)

蜘蛛結網罟 (지주결망고)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는데

橫截下與上 (횡재하여상) 옆으로 아래위로 치고 있네

戒爾蜻蜓子 (계이청정자) 잠자리 너에게 경계하노니

信勿簷前向 (신물첨전향) 절대로 처마 끝엔 가지 말거라

 

명재 윤증 선생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다.

파평윤씨 소정공파 후손으로 논산에 터를 잡고 

수많은 후학을 길러낸 분이다.

 

그의 문하에서 과거급제자가 40여 명이나 나온 것을 보면

그의 학문과 덕행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조정에서는 선생의 깊으신 학문과 고결한 인품을 높이 사서

수시로 벼슬을 내렸지만 선생은 응하지 않았다.

 

단 한 번 관직 등용을 위해 과천까지 왔다가

당시의 인물인 박세채와 밤새 토론한 결과,

당색이 걷힐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

그 길로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세상에 수 많은 강골 선비들이 많지만,

20여 차례나 조정이 내리는 벼슬을 마다한 인물로는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숙종임금은 대면도 안 해 본 선생에게

1품관 우의정을 제수하였으나 꿈쩍도 않았으니.

가히 그의 올곧은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선생의 눈에 거미줄은 당파싸움에 혈안이 된

정객들이 만들어 놓은 함정으로 보였고,

 

잠자리는 당파싸움에 휘말려 패가망신하는 선비들과

혹 있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후손들을 두고 한

경계의 말이 아니었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대통령 후보인 윤석렬이 파평윤씨 소정공파이니

윤증 선생의 직계 후손이 되는 것이다.

 

선생께서는 당파싸움이 치열하던 조선조때에,

혹여 후손들이 벼슬자리에 올랐다가 당파싸움에 휘말려

이름을 더럽힐까 염려한 나머지 거미줄이란 시를 지어

"잠자리야 거미줄 근처에 가지말라"고 비유하며 경계했는데,

그 할아버지가 걱정했던 것을 알까 모를까....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자 벌써부터 갖은

시련을 겪고 있는걸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윤증(尹拯, 1629년 7월 18일, 음5월 28일 ~ 1714년 3월 9일, 음1월 30일)은

조선 중기의 학자, 정치인, 사상가이다.

 

본관은 파평.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당색은 서인에 속하는 소론의 영수이며,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다.

 

윤증은 1629년 한성부 정선방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윤황(尹煌)이고,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할머니는 창녕 성씨로 서인(西人)이자 성리학의 대학자

우계 성혼(成渾)의 딸로, 그는 성혼의 진외증손이었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본가는 충청남도 노성에 있었으므로,

노성 출신으로도 본다.

 

서인 윤선거, 김집, 유계, 권시, 송시열의 문하생으로.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당할 때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유계(兪棨),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권시의 문하에서도 수학했으며,

김집의 추천으로 김집 사후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윤선거의 묘비문 문제로 발생한 회니논쟁(회니시비)과

김익훈, 김석주의 역모 날조에 염증을 느껴 후일 노론이 된 주류파와 갈등하였으며,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를 계기로 송시열과 절교한 후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효종 때 내시교관에 임명되었으나 즉시 사직하고

현종 때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715년에는 아버지와 스승 유계의 공동 저서 <가례원류> 발문속에서

정호(鄭澔)로부터 비난을 받아 당쟁이 격화되어 소론이 거세당하고,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판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가 사망한다.

 

사후 좌의정에 증직되었으나 <가례원류> 문제로

후에 그의 관직도 추탈당하였다가 1722년에 복구되었다.

 

학문 연구로 일생을 보냈으며, 그는 성리학외에도

양명학과 실학 사상을 접하고 연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