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황진이 이야기

살메기 2006. 12. 15. 16:34

요즘 드라마에서는 기생 황진이가 인기다.

 

기생 身分이란게 요즘의 술집 접대부처럼 이남자 저남자 상대하는 것이었으니

황진이와 같이 일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詩畵歌舞에 능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던 듯 하다.    

 

기생은 무엇이었나 라는 질문에 답하고저 한다면,

김삿갓이 평양기생과 詩로 화답한 내용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김삿갓 : 平壤妓生何所能 (평양기생은 무엇이 능하오?)
- 평양기 : 能歌能舞又能詩 (노래에 능하고 춤에도 능하고 또 시에도 능하지요)
- 김삿갓 : 能能其中別無能 (이리저리 능하다 능하다 하지만 내보기는 별로 능한 것 도 없는 듯 하오)
- 평양기 : 月夜三更呼夫能 (그 중에서도 달밝은 깊은밤 침실로 남자 불러들이는 재주가 가장 능하지요)
 
요즘 드라마로 방영되고 있는 황진이는 송도에서 태어나 송도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

 

황진이는 일류 기생답게 詩畵歌舞에 능했다.

38세를 살다가 간 妓女였는데, 이리저리 꿰어 맞춰보면

우리 윤문과도 조금은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

 

우리 족보중에 己亥譜가 있다.

중종34년 기해년에 만들었으니 지금으로부터 467년전인 서기1539년이다.

 

어느 가문이던 족보를 새로 만들 경우

당시 가장 이름높은 학자를 찾아가 序文을 부탁하는게 풍습이었는데

우리 윤문에서는 대제학인 陽谷 蘇世讓 선생에게 부탁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坡平尹門 己亥譜 序文에는

"木之根厚 枝葉必茂 水之源深 流派必遠....(나무의 뿌리가 튼실하면 그 가지와 잎은 반드시 무성하고,

물의 근원이 깊으면 그 흐름은 반드시 멀리까지 이르나니)" 하면서 시작되는 서문으로,

파평윤씨는 그 근원이 깊고 충신과 정승을 많이 배출한 본받아야 할 명문거족이라고 서문을 지었다.

 

이처럼 우리 윤문의 족보 서문을 지은 소세양은 또한 風流客이었던 모양으로

황진이와 깊은 정을 나눈 몇 남성중의 하나였다 한다.     

 

당시 소세양은,

"송도의 황진이란 계집이 한양까지 이름이 높으니

한양의 풍류꾼인 내가 그 콧대를 누르고 와야지" 하면서 송도를 찾았다.

 

이윽고 황진이 거처의 연못가에 이르러 소세양은

榴(석류나무 류)자 한자를 써서 종을 시켜  황진이에게 보냈다.

 

잠시후 그 글을 받아본 황진이는 즉석에서 漁(고기잡을 어)자 한자 써서 회답을 하여 왔다.

역시 풍류 名妓인 황진이는 榴자가 무슨의미인지 한번에 알아보고 그에 和答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황진이와 소세양은 서로 의기상통하여

그날밤 술과 시를 나누던 끝에 만리장성을 쌓았다.

 

과연 그 한 글자씩이 무슨 뜻이었을까?

 

소세양이 써보낸 글자는 榴(석류나무유)자인데,

이를 한자로 재미있게 풀어 쓰면 碩儒那無遊(클석 선비유 어찌나 없을무 놀유)이다.

다시 풀이하면 "큰 선비가 여기에 와 있는데 어찌 함께 놀지 않으려는가?" 이다.

요즘말로 하면 노골적인 작업성 멘트인 것이다.

 

이에 대한 황진이의 답은 漁(고기잡을어=고기자불어) 이다.
이를 소리나는 대로하여 재미있게 적으면 高妓自不語이고

그 뜻은 "지조 높은 기생은 스스로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라는 뜻이니,

그 속에는 "내 아무리 기생이지만 만약 내게 맘이 있다면

그대가 먼저 내게로 와야 하는게 아닌지요" 라는 은근한 유혹이 숨어있는 것이다.    
 
황진이와 약 한달가량 꿈같은 사랑을 나누던 소세양은 한양으로 떠나야만 하였고

이별하기 전날밤(아마도 가을철 이었던 듯) 함께 정자에 올라 이별주를 마셨는데,

 

그때 황진이가 지었다는 奉別蘇判書世讓(소세양판서를 보내며)라는

이별시는 지금도 많이 애송되는 시다.   

 

月下庭梧盡(월하정오진) 달빛 내리는 뜰앞 오동잎은 모두 지고
霜中野菊黃(상중야국황) 서리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어났네.
樓高天一尺(루고천일척)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을 듯 한데
人醉酒三觴(인취주삼상) 우리님은 벌써 술 몇 잔에 취해 버렸네.
流水和琴冷(류수화금랭) 흐르는 물소리는 거문고소리처럼 찰랑거리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향은 피리소리에 서려 더욱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우리서로 이별한 후에는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쌓은정만 푸른물결처럼 끝없이 이어지리.
 
이후 당대 제일의 시객이자 풍류남이었던 임제(林悌, 호는 백호白湖, 1549~1587)는

황진이를 한번 만나보는 꿈을 간직하고 있던차

마침 평안도에 벼슬을 받아 부임하여 가는 길에 송도에 들러 황진이의 소식을 물었으나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황진이의 무덤을 찾았다.

 

임제는 황진이의 무덤에 술잔을 올리고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황진이를 애도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이후 임제는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체통을 돌보지 않고 한낱 기생을 추모했다 하여

결국 벼슬길에 다 이르지도 못한 채 파직을 당하였다 한다.

 

황진이, 소세양, 임제 모두 멋진 풍류객들이다.  

이들이 지금도 살아있다면, 전지현 최지우나 배용준 정도는 그 앞에서 명함도 못내밀성 싶다.

 

우리 尹門 족보의 序文을 지은 양곡 소세양 선생도 名妓 황진이도 까마득한 옛날사람인데...

지금 드라마로 되살아나 장안을 뜨겁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