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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구름 (퍼온글)

작은 문학관

by 살메기 2018. 2. 26.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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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계절인데 언덕에 누워 하늘을 본다.


시선 머무는 곳에 하얀 구름들

구름은 바람에 밀려오고 밀려온 구름은 또 밀려간다.

바람에 밀려 밀려서 오는 구름 그리고 밀려가는 저 구름 구름은 밀려오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밀려가 아주 산을 넘어 가버리기도 한다.


내 머리 위에 머무는 구름은 없다.

그래서 구름이 지나간 하늘은 허이고 공( 虛空 )이 된다.


사람도 구름 같아 옷깃을 스쳐가고,

그렇게 스쳐가고 다시는 아니 온다.


처자와 같이 한동안을 옆에서 동반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갈 뿐이며

가면 아니 오고 그리고 간 사람들은 머리에서 잊혀진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죽어도 잊을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공무원 초년 ( 初年 )시절을 충청도 어느 산골에서 보냈다.

사방이 까마 아득히 높은 산들로 에워싸인 深深山川이다.


업무래야 더러는 구름이 허리를 감도는 심산유곡의 산가 ( 山家 )를 찾아

제 조사나 호구조사를 다닐 때도 있지만,

거의는 적막 절간 같은 경찰지서 사무실에서 청사를 지키며 세월을 보냈다.


지원병에서 제대를 하고 경찰에 입문한

약관을 갓 넘긴 나는 숙직실에서 숙식을 했다.


나이 먹은 직원들이 출장을 가고나면 아무도 없는 사무실을 지키며,

다니다 만 학교에 복학을 하기 위해 책을 보거나 청소를 하기도 하고

또 가벼운 구기운동으로 소일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양지 녘에 자리한 지서청사는 낡은 고옥인데 텃밭이 넓었고,

둘러쳐진 측백나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우측에는 초등학교 교장관사와 접해 있었다.


어느 초여름 정오 무렵이었다.

청사 앞 정원의 느릅나무 교목에 걸린 하얀 구름 한 조각이 흐드러지게 핀

텃밭의 진홍색 작약꽃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직원들은 여느 때처럼 모두 출장 중이었고,

자주 사무실을 기웃거리던 관사 식구들도 어디론가 몰려가 집들이 모두 비었으며

모내기철이어서 동네 집과 골목들도 온통 적막산천이었다.


습관대로 사무실 안팎을 쓸고 닦고 물을 뿌리고 나니 마음이 상쾌했다.

이때였다.

 ‘ 타 - 악 ’ 무엇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난다.


자리에 앉아 부책을 뒤적이던 나는 놀라 창 쪽으로 다가가 문을 연다.

텃밭의 장다리와 파 꽃 감자 꽃에 벌 나비들만이 분분 ( 紛紛 )할 뿐

기척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무슨 일일까? 다시 자리에 앉아 하던 일을 계속한다.


탁 - 콩알만한 돌이 다시 창문을 때린다.

이번엔 현관문으로 나와 사알 살 뒤꼍을 살피며 돌아본다.


깜짝 놀랬다.

터질 듯 부푼 젊은 소녀가 기둥에 기대서서 방글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한두 번쯤 본 듯한 옆집 교장선생님 댁 도시에 나가 여고에 다니는 딸이다.


“ 아니 놀랬잖아,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웬 장난이야, ” 미소를 띠며 묻는다.

소녀는 다시 빙긋이 웃고 말이 없다.


“ 따라와요. ”

내가 앞서고 소녀는 뒤를따라 사무실로 들어온다.

빨간 스웨터에 긴 치마차림인데 훤칠한 키에 흑발 ( 黑髮 )이

철렁거리고 볼이 희며 입술이 붉은 미인형이다.


“ 앉아요, 왜 서서 그래. ”

수줍어 벽면을 향해 계시물 만을 쳐다보고 있는 소녀에게 의자를 권했다.


잠시 서성이던 소녀는 나의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다가 겸연쩍어하며

후딱 치맛바람을 날리고 밖으로 나가더니 지서정문을 돌아 집으로 가버렸다.


나는 뒤쫓아가 문밖에 서서 그가 사라진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처녀의 결벽일까 > 마구 가슴이 두근거리고 허전했다.


감자 꽃과 파 꽃에 벌 나비가 더 분분히 날고있고

진홍색 작약 꽃이 요염한 모습으로 쳐다보고 있다.

싱거운 놈들 뒤꼍 감나무 가지 위에서 황조( 黃鳥 )두 마리가 사랑 놀음을 하고있다.


나 역시 어린 나이의 호린 몸매이고,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젊음이며 동안 ( 童顔 )이었다.

나이든 동네 어른들은 귀엽다고 했고 젊은이들은 흠 없는 외모를 선망했다.

그 여학생과는 큰 차이가 없는 연륜이지만 신분은 학생과 경찰관이었다.


푸른 계절에 푸른 젊음,

가로막은 측백나무 울타리는 터지려는 젊은 소녀를 가두어 두기엔 너무 허술했다.


젊은 소녀는 자신을 가리고 있는 울타리를 쉽게 젖히고 역시 젊은 나에게 당겨져 왔다.

그러나 허술한 울타리는 쉽게 젖혔지만 경찰관과 학생이라는 또 하나의 벽에 가로막혀 아쉬움만,

몹시 아쉬움만을 남기고 발길을 돌린 것이다.


그 후 소녀는 다시 나를 찾아왔다.

나의 근무 날자 까지를 안다고 말하는 소녀는 전보다 활달하게 행동했는데 성격이 밝았고,

용모와 행동이 반듯했으며 학생답지 않게 성숙미가 몹시 풍겼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가 되어 서로 자신들의 주변에 대해 스스럼없이 얘기했고,

농담 섞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나

학생과 경찰이라는 신분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말하고 행동했다.


혹시 사랑이라도 하면 절대 안 되는 줄 알고

서로의 마음을 이성 ( 異性 )으로 대해질까 조심을 했다.


문학서적을 즐겨보는 나에게 자신도 여고 졸업반이며

문학소녀인데 대학교 진학관계로 바쁘다 했고,

휴가로 잠시 집에 와 쉬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가정사항에 대해 얘기할 때 그의 오빠인 준이가

나와 중학교 동창이라는 것이 감지되었는데 모른 척 했다.

그의 이름은 숙이라하며 오빠라 부르겠다고 했다.


텅 빈 청사 사무실에서 둘이 얘기를 주고받았고 그리고 텃밭에서 풀꽃을 따며

그와 나는 학업에 대한 얘기와 문학에 대한 대화를 주로 했는데

서내근무 때엔 그녀가 기다려졌고 그녀도 자주 찾아와 밝은 표정으로 놀다가곤 했다.

그렇게 그와 나는 몇 번을 더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서 텃밭에 시들어 가는 장다리와 파 꽃

그리고 감자 꽃들이 어둠에 묻혀가고 있는 초저녁이다.


그 날도 절간 같이 적막한 지서 안 마당을 서성이는데 숙이가 찾아왔다.

측백나무 울타리 뒤에서 머뭇머뭇하기에 누군가 했더니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어? ”

전 같지 않게 말이 없어 내가 물었다.

대답이 없다.


“ 아니 왜 말이 없어.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

“ 나 내일 학교로 가요. 한동안 못 볼 것 같아요. ”

“ 그래? 섭섭하군 퍽 재미있었는데 ”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더니 더니 숙이 때문에 즐거웠고

마음이 흔들렸고 그리고 몰래 사랑했는데,

그가 떠난다니 정말 섭섭했다.


숙이는 멍하니 서 있다가 손에 가졌던 물건을 나에게 내밀었다.

“ 아니 이게 뭐야. ” 나는 물건을 받았다.

“ 책 이예요. 선물 받은 엘리엇의 ‘황무지` 시집인데 난해해 재미없어서,....

오빠라면 이해할 것 같아 드리는 거예요. ”


“ 고맙군. 그러잖아도 좋은 책이라 알고 있었는데 언젠가 한번 구해 보려던 책이야.

어떡하지 이렇게 좋은 선물을 염치없이 받기만 해서 ”

“ 이 책 꼭 드리고 싶었어요. 다음에 좋은 거 답해 주시면 되지 않아요.? ”


“알았어요. 꼬옥 꼭 약속할게. ”

어둠이 완전히 내린 지서 측백나무 울타리 옆에서 우리는 얘기를 주고받으면서도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하고 몹시 서운했다.


“ 나 꼭 할 말이 있는데 해도 괜찮을까? “

숙이는 쑥스러운 듯 머뭇거린다.


“ 무슨 말인데 빨리 하라구. “

재촉했는데 묵묵 부답이다.


“ 어서 해. 숙이의 말이라면 다 들어줄게, 들어주고 말구”

“ 그래요 응  언제 결혼해요? ”


“ 웬  결혼은... 나이도 있고 공부도 더 해야 하는데. ”

“ 꼭 해야 할 말이 있는데 다음에 할게요. ”


농담처럼 한마디 한 그는 쑥스러운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울타리 모서리를 돌아 집으로 뛰어 가버렸다.

다시 찾겠다고 약속한 그녀는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다음에 하겠다던 말도 끝끝내 토설 하지 않고 캄캄한 흑막 속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오가지도 않고 소식도 없는데 엔 속수무책이었다.


의 집 식구들이나 또 가깝게 지나는 사이도 아닌 그의 오빠에게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그의 모습을 지울 수 가없었다.


숙이와 나의 꽃나무를, 어느 봄날 뒤꼍 화원에서 숙이와 내가심은 꽃나무,

우리의 꽃나무를 물주고 가꾸었으면 꽃을 피웠을 텐데,

우리 둘이 는 그 나무를 돌보지 않아 시들어 버렸다.


다시 찾겠다고 한 숙이의 말과 그리고 그가 준 소중한 선물에 답례를 꼭 하마했던 나의 말,

우리 둘의 약속은 모두가 진애 ( 塵埃 )되어 허공으로 날라 가버리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도 그의 모습은 잊혀지지 않았다.

고요한 젊은 가슴을 바람처럼 휘젓고 가버린 숙이,

내 가슴에 옹이로 박힌 그의 모습은 세월이 흘러도 더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조사 서류 보 ( 褓 )를 막대 끝에 비끄러매 둘러메고

그녀의 모습을 가슴에 꼬옥 간직한 채 산촌을 돌아 출장을 다니고

그리고 떠돌이가 되어 구름을 보고 바람을 따라 가고 그리고 또 걸었다.


그렇게 가다보니 매정한 세월이 쉬지 않고 흘렀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서울의 어느 동창회 회식 자리였다.


마침 주흥이 무르익었을 때 나는 숙이의 오빠 준이의 옆자리로 접근해 갔다.

그리고 반갑게 정담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가 눈치채지 않도록 나의 주변과 충청도 어느 산골에서

초임경찰로 근무한 사실까지 자세히 얘기해주고 그네의 근황을 말하도록 유도해 나갔다.


그의 부친은 오래 전에 작고하시고 자신은 국영업체 간부로 일하다가 퇴임했다고 하며

초년 시 그곳에 근무하는걸 알았더라면

한번 찾아보았을 거라고 말하며 아쉬워하기까지 했다.


“ 맞아, 이후에 자네가 그 지방에 경찰로 있었다는

얘기를 친구들로부터 들어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 ”

내가 권하는 술잔을 들으며 그가 얘기했고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 아버지께서 그곳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 하셨고 학교의 관사는 우리 지서 옆에 있었지.

그러고 그때 자네 여동생도 어디 여고에 다닌다고 하던데 잘 계시는가? ”


“ 맞아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했는데 일찍 혼자 되었어,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데 당시 재혼을 하라고 해도 굳이 안 하겠다고 하는 거야.

지금은 독신이지 그리고 처음의 혼사도 결혼을 안 하려해서 식구들이 퍽 애먹었어.


“ 그렇군, 안됐네. ”

잘살아간다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퍽 가슴이 아팠다.


정담을 나누며 술을 조금 더하고 동창회는 끝났다.

푸른 하늘에 뜬구름, 하얀 구름이 여러 가지 모형을 하고 무수히 흩어져 있다.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있는 구름도 심술쟁이 바람이

스치기만 하면 본래의 모습을 잃고 이지러지고 만다.


인간사 천변 만화이고 뜬구름이다. 구름은 허상이고,

구름 같은 우리네 삶은 허행 ( 虛行 )이다 .


삶이 부운 ( 浮雲 )이라며 구름과 더불어 부유하던 떠돌이 시인 김삿갓,

삿갓으로 햇빛과 짓궂은 눈비를 가리고 지팡이에 곤고한 육신을 의지한 채

가파른 언덕에 올라 구름을 쳐다보며 말했다.


萬事 皆有定 모든 일 정해진 것인데

浮生 空自忘 떠도는 삶 왜 서두르나.


내 삶의 여정에 옷깃만 한번 스쳐간 여인이고 잊혀지지 않는 여인이고,

죽어도 잊을 수 없는 여인이고 나와는 남남으로 정해진 여인이 숙이이다.


꽃피고 벌 나비 분분할 때 허술한 옷자락으로 부푼 가슴을 가릴 수 없어,

허연 젊음을 비죽이 노출시키며 둘러싼 울타리를 헤치고

그리고 사랑할 곳을 찾아 당겨져 왔던 소녀 숙이,....


그렇게 찾아온 사랑을 아쉽게도 경찰관이라는 탄탄한 벽에 가리워 져

그 벽을 허물지 못하고 모른 체 외면한 나......


사랑을 심어놓고 그 사랑을 마냥 버려 둔 채 소녀는 꽃 지고 어둠이 내리던 그 날,

허공을 한번 쳐다보며 허망한 웃음을 남긴 뒤

측백나무 울타리 모퉁이를 돌아 가버리고 그리고 다시는 아니 왔다.


바람에 밀려, 밀려서 떠돌던 나는 얼마 전에 그곳엘 가 보았다.

바람에 스치어 이지러진 그녀와의 만남을 회억 ( 回憶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모두 없어졌다.

바쁘게 살아가던 사람들도 또 옛날에 정 주었던 거리와 집들도 보이지 않고 낯선 것들뿐이었다.

숙이가 살았던 집도, 숙이가 그림자만을 남기고 사라져간 측백나무 울타리도 모두 없어진 것이다.


나는 사랑이 아쉬워 하늘만을 바라보던 그녀처럼,

하늘의 뜬구름만을 한번 쳐다보고 허정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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