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증(尹拯, 1629년 7월 18일, 음5월 28일 ~ 1714년 3월 9일, 음1월 30일)은
조선 중기의 학자, 정치인, 사상가이다.
본관은 파평.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당색은 서인에 속하는 소론의 영수이며,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다.
윤증은 1629년 한성부 정선방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윤황(尹煌)이고,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할머니는 창녕 성씨로 서인(西人)이자 성리학의 대학자
우계 성혼(成渾)의 딸로, 그는 성혼의 진외증손이었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본가는 충청남도 노성에 있었으므로,
노성 출신으로도 본다.
서인 윤선거, 김집, 유계, 권시, 송시열의 문하생으로.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당할 때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유계(兪棨),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권시의 문하에서도 수학했으며,
김집의 추천으로 김집 사후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윤선거의 묘비문 문제로 발생한 회니논쟁(회니시비)과
김익훈, 김석주의 역모 날조에 염증을 느껴 후일 노론이 된 주류파와 갈등하였으며,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를 계기로 송시열과 절교한 후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효종 때 내시교관에 임명되었으나 즉시 사직하고
현종 때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715년에는 아버지와 스승 유계의 공동 저서 <가례원류> 발문속에서
정호(鄭澔)로부터 비난을 받아 당쟁이 격화되어 소론이 거세당하고,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판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가 사망한다.
사후 좌의정에 증직되었으나 <가례원류> 문제로
후에 그의 관직도 추탈당하였다가 1722년에 복구되었다.
학문 연구로 일생을 보냈으며, 그는 성리학외에도
양명학과 실학 사상을 접하고 연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