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 유허추모비 비문 번역 (전남 화순 소재)
(嗚呼此靜蓭趙先生謫廬而仍爲臨命之遺址也, 嗚呼今去己卯之歲百四十有九年而學士大夫
慕其學黎民胥徒懷其澤愈久而愈不忘皆曰 使我東偏知君臣夫子之倫免夷狄禽獸之域者先生賜也
其過此者無不肅然致敬 嗚呼此孰使之然哉其秉彛之心自然而然爾
嗚呼彼袞貞景舟之徒果何人哉 盖我箕邦自殷師以後上下數千年間
道學堙晦間有鄭圃隱金寒暄諸賢前後倡明之 然其承洛建之淵源志唐虞之熙雍
卓然以明德新民爲此學之標準者則肇自先生不可誣也 先生諱光祖字孝直漢陽人成化壬寅生焉
正德庚午進士壯元乙亥及第官至大司憲 己卯十一月禍作是月謫居于此其屋官奴文厚從也
翌月二十一日後命至焉 今上丁未則崇禎紀元之四十年也
本州牧閔侯汝老懼久而失其處 建碑而表之昔程夫子顔樂亭銘曰水不忍廢地不忍荒
嗚呼正學其何可忘嗚呼斯可以銘此碑矣 四月丙辰後學崇祿大夫議政府右贊成兼成均館祭酒世子貳師宋時烈記 正憲大夫原任議政府左參贊兼成均館祭酒世子侍講院贊善宋浚吉書
通政大夫守忠淸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閔維重篆
오호라 여기는 정암 조선생의 귀양살이한 집이요, 또한 운명하신 유허(遺墟)이다. 오호라 이제 중종 기묘년을 소급하면 149년이 되었으되 학사와 대부는 그 도학을 숭모하고 백성과 관리는 그 은덕을 그리워 하여 오래 되 더욱더 잊지 아니하고 모두 이르기를 우리 동쪽 편방(偏邦)으로 하여금 군신 부자의 윤리를 알게 하고 이적(夷狄), 금수(禽獸)의 지역에서 면하게 한 것은 진실로 우리 선생님의 주심이라 하고 여기를 지낸 자 숙연이 치경(致敬)치 않을 이 없으니.
오호라 이는 뉘가 시켜서 그러겠는가. 그 병이지심(秉彛之心)이 자연히 우러나 그런 것이어늘.
오호라. 저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무리는 과연 그 어떤 인간들인가. 대개 우리나라는 기자가 도해(渡해)한 후로 상하 수천년간에 도학이 회명(晦冥)하여 간혹 정포은(鄭圃隱), 김한헌당(金寒暄堂) 제현께서 혹선혹후(或先或後)하여 도학을 창명(倡明)하였으나 그러나 그 정주(程朱)의 연원을 계승하고 요순의 정치에 뜻을 두고 탁연히 명덕(明德), 신문(新民)으로 이 유학의 표준을 삼은 이는 이 선생으로부터 되었음을 속일 수 없으리라.
선생의 휘(諱)는 광조(光祖)요, 자는 효직(孝直)이요, 한양인이니 성화 임인(成化 壬寅 1482년)생이다.
정덕 경오(正德 庚午 1510년)에 진사 장원하고, 을해(乙亥 1515년)에 급제하여 대사헌에 이르렀다. 을묘(乙卯 1519년) 11월에 북문의 화가 일어나 그 달에 이곳으로 귀양오시니 그 옥 (屋) 주인은 관노문후종(官奴文厚從)이라 익월 20일 사약이 내렸다. 금왕의 丁未年(현종6, 1667년)은 숭정(崇楨) 기원후 40년인데 본주 목사 민여로(閔汝老)가 오래 되면 그 유지(遺址)를 잃을가 염려되어 입비하여 표시하였다.
옛 정부자(程夫子)께서 안악정명(顔樂亭銘)에 이르기를 물과 땅을 차마 황폐치 못한다 하였거든 오호라 정학(正學)을 어찌 가히 잊을 수 있으리오. 이를 가히 이 비에 새길지로다.
4월 병신(丙辰)에 후학(後學) 숭록대부의정부우찬성 겸 성균관제주세자이사 송시열이 기(記)를 짓고 정헌대부원임의벙부좌참찬 겸 성균관제주세자시강원찬선 송준길이 쓰고 통정대부수충청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 민유중이 전자(篆字)하다. <역: 우석 이진백 (愚石 李鎭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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