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를 하시는 아버님 영향 때문인지 나도 어쩌다가 붓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서예와 사군자 문인화를 취미삼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옛 한시에도 관심이 있어 좋은 시들을 골라 틈틈이 읽고 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게 벌써 10여년 전으로 뛰어난 실력은 안되지만
조금 이름있는 공모전에 출품하여 몇차례 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2년전쯤 제가 업무차 돌아다니던 서울 삼각산 아래
삼양동이라는 동네에 조그만 대서소가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젊을적에 공무원을 지내셨다는 80을 넘기신 할아버지께서
3-4평이나 될까말까 하는 대서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우연히도 할아버지와 성이 같음을 알게되어 그 대서소를 들릴때면
집안 어르신 같은 느낌마저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가끔 생각나는 대로 옛 시 한수씩 적어드리고 할 때면
할아버지께서는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어느 봄날, 그날도 마침 시간여유가 있어서 할아버지의 대서소를 들렀습니다.
이러 저런 얘기를 하다가 문득 생각내키는 싯귀가 있길래 적어드렸습니다.
서산대사 열반송(涅槃頌---죽음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읊는 게송)
이라고도 하는데 이런내용입니다.
生也一片浮雲起 태어나는 것은 한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死也一片浮雲滅 죽는다는 것은 한조각 뜬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浮雲自體本無實 뜬구름 자체가 본시 그 실체가 없는 것이니
生死去來亦如然 낳고 죽고 오고 감이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니라
할아버지께서는 글을 읽어보시더니 연세가 연세이신 만큼
가슴에 와 닿는 듯,
연신 "그렇지, 맞아! 그려" 하면서는 손수 큰 종이에다 옮겨적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맘속으로 왠지 죄스런 마음이 드는게,
이제 한창 중년인 내가 할아버지께 인생을 가르치려 드는 무례함을 보이는것은 아닌가?
아니면 할아버지께 이제 돌아가실 나이가 되었지 않느냐며
생을 재촉하는 불경한 짓이나 하지 않았는지 여러생각이 교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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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대서소를 나온 그날이후,
다른자리로 부서이동이 있어 한동안 그 대서소를 가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차를 타고 우연히 대서소 앞을 지나면서 바라보니
한창 문이 열려있어야 할 대낮에 셔터가 내려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차에서 내려 대서소 옆 분식집 아주머니께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옆에 대서소 할아버지는 안나오셨나요? 셔터가 내려져 있네요"
분식집 아주머니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할아버지 돌아가셨어요. 한 2주 됐어요"
나는 속으로 "아 그러셨구나, 그렇게 가셨구나" 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문득 내가 써드렸던 서산대사 싯귀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인생이란 한조각 뜬구름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그 시를 읽어보고 "그렇지 맞아" 하시며 공감해 하시던 할아버지께서는
뜬구름 사라지듯 그렇게 세상을 떠나신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