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선(善)을 표창하고 미(美)를 칭찬한 것은 국가(國家)에서 가상히 여긴바요. 유림(儒林)이 마땅히 힘쓴바이니 진실로 선행(善行)과 미덕(美德)이 갖춘 사람이 있으면 어찌 가(可)히 표창하고 칭찬하여 후세를 권장하고 징계하지 아니하리요. 최사문(崔斯文) 상옥(相玉)은 전주인(全州人)이니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 만육(晩六) 휘량(諱瀁)의 후요. 서남(瑞南) 윤봉(允鳳)의 자(子)이다. 젊어서 빈곤하여 할길이 없어 일찍 토건업계(土建業界)에 투신(投身)하여 마침내 능히 큰 재산을 이루었다. 교만하고 인색하여 자부하여 자기의 이목(耳目)이나 신체(身體)의 즐길바를 상케이 하고자 할것이로데 오직 겸공(謙恭)하고 근검(勤儉)하며 부모(父母)를 섬기매 안락(安樂)을 갖추어 극진히 여겼다. 조상(祖上)을 받들매 성력(誠力)을 다하며 학교(學校)를 일으키고 영재(英才)를 기르며 지역(地域) 번영한데 이르러 넉넉한 예(例)로 권장하고 의연금(義捐金)을 낸것이 다대(多大)하였다. 오직 우리 돈인재(敦仁齋)는 옛적에 개축하였으나 체제(體制)가 구차함을 면치 못하니 누차 중건(重建)하고자 하였으나 재원(財源)이 가난함으로 사림(士林)들이 한탄해온지 오래러니 사문(斯文)이 특별히 이에 뜻이 있어 홀로 거액을 연출하여 증대하게 복원(復元)하니 그 마루대와 처마의 장대하고 화려함과 기와의 완미(完美)함과 제도(制度)의 치밀한 것이 진실로 교궁(校宮)의 돈인재(敦仁齋) 모습을 잃지 아니한즉 그 선행(善行)과 미덕(美德)을 뉘 찬미하지 않겠는가. 장차 돈인재(敦仁齋)로 더불어 함께 높아 백세(百世)토록 썩지 않으리라. 향유(鄕儒)의 의논이 재발하여 장차 돈을 깍아 실적(實績)을 기록할제 나에게 기(記)를 청함에 보고 느낌이 많아 감(敢)히 글을 못한다 사양치 않고 즐겁게 쓰니라. 서기 1982년(임술)7월 일 전주(全州) 이진백(李鎭白) 글을 짓고 신천(信川) 강인환(康仁煥) 글을 썼다. 화순향교 전교 최영학 총무 배기송 장의 임노환 정종표 조기환 장병탁 최병옥 조연혁 이진백 이응표 이동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