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登 金烏山 採薇亭 慷慨而吟用板上韻子--- 금오산 채미정에 올라 슬퍼탄식하며 현판의 옛싯귀에서 운자를 따 짓다

愚 石 漫 錄

by 살메기 2011. 10. 11.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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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 선생님께서 어느날 구미 금오산 채미정을 방문한 후

야은 길재 선생님을 추억하며 지으신 시입니다. 

 

 

 

 

 

 登 金烏山 採薇亭 慷慨而吟用板上韻子  --- 愚石 李鎭白 

 

金烏山下採薇亭 금오산 아래 채미정에 오르니 

尙友夷齊節義靑 책속의 옛 성인 백이숙제의 절개처럼 푸르르다

百世淸風吹不盡 수백년 이어지는 선비정신 맑은바람 타고 끝 없이 불어오니  

綠陰植杖去還停 녹음속 지팡이 꽂고 가던걸음 멈춰 되돌아 본다



冶隱 吉再 선생님과 구미 金烏山 採薇亭

금오산은 남숭산이라 하여 해주 북송산과 더불어 삼한의 영산으로 이름 높다.

창공에 드높은 기상은 실로 의연한데 기암절벽 폭포는 깊고 맑은 정기를 더욱 왕성케 한다.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는 남성을 열어 기름진 들녘이 풍성하다.

 

일찍이 고려三隱중 한사람이며 고려충신인 충절공 野隱 길재선생이

이 산에 은거하시어 곧은 절기를 지켰으니 후세의 숭앙을 받아 마땅 하다.

 

중국 고사의 백이숙제가 산속에 은거하여 고사리를 먹으며 절의를 지킨 것처럼

길재선생이 초야에 은거하여 절조를 지킨 금오산 아래에 후세 사람들이

採薇亭(고사리를 꺾은 정자) 이란 이름의 정자를 지어 길재 선생의 자취를 추억하고 있다.

 

길재선생의 본관은 해평(海平)이요,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이고,

시호는 충절(忠節)공이다. 금주지사(錦州知事) 원진(元璡)의 아들로. 구미에서 출생하였다.

 

1363년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처음 글을 배웠으며,

1370년 박분(朴賁)에게논어》《맹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하였다.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李穡) ·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生員試),1383(우왕9)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하였다.

 

1389(창왕1)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여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였으며,

고향으로 가는 길에 황해도 장단에 있던 이색(李穡)을 만나기도 하였다.

 

1390년 계림부(鷄林府)의 교수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죽음을 듣고 마음으로 3년상을 행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정종 2)에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1402(태종 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 가례(家禮)를 따랐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이 학맥을 이었다.

 

이후 청풍서원(淸風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야은집》 《야은속집(冶隱續集),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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