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우거지고 흰 이슬 내린 달 밝은 가을밤에 / 반쯤 취해 조용히 읊조리며 멋대로 흥을 돋궈보네 / 감과 밤은 생기 넘치고 집 뜰의 버들 쇠잔한데 / 국화와 단풍이 염화루(斂花樓)에 다시 비추이네 蒹蒼露白月明秋 半醉微吟興自流 柿栗生光衰柳院 菊楓更暎斂花樓
이때가 풍물 감상하기 가장 좋은 시절이니 / 강산 그 어디인들 유람하기 좋지 않으랴 / 밤비내리니 뒤척이며 천만가지 상상이 떠올라 / 종래에는 왕유라 하더라도 그림으로 그리기 어려우리 此時風物尤堪賞 何處江山不勝遊 宵雨翻成千萬像 縱來摩詰畵難收
시에서 염화루(斂花樓)는 화순에 있는 누각(정자)이름이고 摩詰(왕유, 王維, 699? ~ 759)은 중국 당(唐)의 시인이자 화가로서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시와 수묵(水墨) 산수화에도 뛰어나 남종문인화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인물을 말하고 있다.
이 시는 전남 화순군.읍 앵무동길 17-30으로 앵무산 기슭에 있는 강학소였던 무산정사(武山精舍)를 지어 후학을 가르쳤던 전주인(全州人) 우석(愚石) 이진백(李鎭白 1928~2012)의 강학터다. 1954년 6·25 전쟁 직후에 세워진 사가의 누정으로서 이진백의 부친 이길주가 독서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그의 문집 우석만록집(愚石漫錄集)에 실린 추흥(秋興) 시이다.
무산정사는 앵무동마을 앵남 보건소에서 마을 회관을 지나 좌측으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요 독립운동가였던 지강(芝江) 양한묵(1862∼1919) 선생의 묘소를 가기전 길목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도 기거하고 있다.
우석은 1928년 이곳 앵남리에 태어났으며 소년시절부터 천성이 중후하고 의지와 기개가 비범하였으며 곡성 완계초당(浣溪草堂)에서 안훈(安壎)에게, 능주의 수산정사(壽山精舍)에서 배석면(裵錫冕)에게 수학하며 경적을 강구(講究)하였다.
학문을 두루 섭렵하여 갈고 닦았다. 경전의 깊은 이치를 연구하여 학문과 지식이 옹골차고 크고 넓다. 믿고 따르는 자가 모여들어 교학상장(敎學相長)하였다.
화순읍지(和順邑誌)를 출판하고, 군지(郡誌)를 번역하며 군사(郡史)를 감수(監修)하였다. 1987년 3월 18일부터 1991년 2월 28일까지 유도회(儒道會) 화순 지부 회장과 화순 향교의 전교(典校)를 역임하였다.
1986년 문인식 공적비(文仁植功績碑) 글을 짓는 등 화순 일대의 비문을 쓰고, 정자에 시를 남겼다. 1988년 2월 1일부터 1990년 1월 31일까지 화순 향교 전교를 지냈다.
국조전 창건 기실비 비문을 보면 1997년 김행곤(金行坤), 이병근(李炳根)을 주축으로 초대 회장에 조필환(曺必煥)을 추대하고 국조 숭모회(國祖崇慕會)를 발족시켰다.
1999년 화순 향교지의 고문서 번역 및 교정을 담당하였으며, 2004년에는 우석만록집(愚石漫錄集) 2권을 간행하였다.
그는 많은 시문을 남기고 떠났다.
그중에는 화순군 이서면 보산리에 1687(조선숙종)년 광산김씨(光山金氏) 31대 손 석정처사(石亭處士) 한명(漢鳴)이 건립한 松石亭에도 그의 생애 만년에 읊은 詩가 있다. 송석정은 1880년대에 중건(重建) 되었다가 한국전쟁(6·25동란)으로 소실(燒失) 된 것을 후손들의 노력으로 2003년에 복원한 정자이다.
빼어난 소나무 숲속의 정자에 이름 지어 붙인 곳은 /아름답고 고요한 산수의 경치가 십리나 뻗어 있네/ 자연을 노래하는 분위기를 꾸미고 얽는 일에 / 오직 마음과 정신을 자기 한 몸에 쏟았다네. 松林泉石命名亭 十里煙霞未肴形 嗥吸山光極系色 心神儷家一身軴/嗥吸山光
어느날 구례 출신으로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하여 저술활동을 하였으며 서학(西學) 등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성리학적 정통을 수립하는 데 주력한 학자이자 서예가였던 고당 (顧堂) 김규태(金奎泰1902 ~ 1966)가 이곳에 들려 시를 읊기를 "평천동 물줄기 따라 거슬러 올라가니/늙은 느티나무 우람한 버드나무 문을 덮었다. 십년 은둔한 호남 길손 태화촌을 찾았다/ 밤 베개에는 시냇물 소리 줄어들까 염려하고/시단의 먹물 흔적에 유독 감회가 깊다. 어떡하면 다시 풍류 시사 결성하여/나는 거문고를 그대는 노래를 부르며 아침저녁 즐겨볼까?
정자는 팔자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내실이 3칸으로 나눠져 있으며 중앙에 무산정사(武山精舍)라는 현판이 좌측은 견사(見思)의 혹(惑)을 끊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견사재(見思齋), 우측은 대나무의 굳은 절개를 높여 차군헌(此君軒)라는 현판을 걸었다. 건립당시에는 초당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의 학자로 1333년 원나라 정동성 향시에 수석으로 급제하였던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 ~ 1351) 어느 촌사(村舍)에서 차군(此君)에 대해 시로 "이 집엔 술도 있고 대나무 또한 많으니 / 벽에 제하며 주인에게 물을 것도 없겠네 此家有酒仍多竹 題壁何須問主人"라고 노래했다.
또 차군(此君)에 대해 대나무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하루도 차군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何可一日無此君〕”라고 말했던 동진(東晉)의 왕휘지(王徽之)가 어느 날 어떤 사대부의 집에 멋있는 대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집에 들르니, 집주인이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왕휘지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대숲으로 가서 감상을 한 뒤에 바로 떠나려 하였다. 이에 주인이 당황하면서 문을 닫아걸고 못 나가게 하며 그를 끝내 만류하자 왕휘지가 그 성의를 높이 평가하여 그 자리에 머물러서 함께 술을 마신 뒤에 떠났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80 王徽之列傳
십년(十年)을 북학(北學)하여 일당(一堂)이 새로운데/공정(工程)이 오묘하여 진리를 찾았다 말하랴 찾아온 시예우(詩禮友)에 스스로 부끄러우나/다소의 강론한 사람이 다시 반갑구려 十年北學一堂新 敢說工程妙人眞 自愧信從詩禮友 更歡多少講論人
지명은 앵무촌(鸚鵡忖) 마을의 앵(鸚)자와 화남리(花南里)의 남(南)자를 각각 취하여 앵남리라 하였다.앵남리가 있는 화순읍은 감도리 강정리 계소리 광덕리 교 리 내평리 다지리 대 리 도웅리 동구리 만연리 벽라리 삼천리 서태리 세량리 수만리 신기리 앵남리 연양리 유천리 이십곡리 일심리 주도리 향청리 훈리로 구성 군의 중심지이다.
이진백이 화순적벽에 망향정(望鄕亭)에 올라 읊은 시로 또다른 정자의 흔적을 찾으러 나선다.
복을 주는 강가에 뛰어나게 우뚝 솟은 망향대는/백리의 고요한 산수의 경치가 속처럼 열린다. 경치 좋은 곳에 신기한 꽃이 한없이 피고 지는/숲이 우거지니 새들이 좋아서 왕래가 빈번하다. 福川傑立望鄕臺 百里煙霞眠下開 景勝奇花含不絶 林深好鳥去仞回
조상님을 모실 생각이 나면 아무 때나 특별히 /당에서 제사를 올리기 위하여 미리 와 준비한다. 산수경치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성을 다해 올라 /가리켜 보이며 즐거워하고 거듭 잔을 기우린다. 如思梁梓無時別 爲掃墳堂逐前來 樂水樂山進慕切 逞然指點復傾盃 武山敬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