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숙 (문학동네·1만원)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간에 250년이나 끌어온 소송이 2010년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소송 원인은 묏자리였다. 파평 윤씨가에서는 조상인 고려 재상 윤관의 묘 위치를 잃어버려 옛 기록을 토대로 그의 묘를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경기도 파주에서 묘갈(墓碣·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 파편을 발견해 묘지 위치를 확인한다. 하지만 바로 위쪽에 청송 심씨 심지원의 묘가 위치해 있었다. 윤씨가에서는 심씨가에 심지원 묘의 이장을 요구했지만 심씨가에서는 이장할 수 없다고 맞선다. 양측이 한 치의 양보 없이 대립하며 조정을 어지럽히자 영조는 이들을 직접 심문해 형장을 치고 귀양까지 보냈다. 대체 이들은 무엇 때문에 왕의 진노까지 사면서 250년 동안 싸움을 계속한 것일까. 그건 유교 의식에 기반을 둔 가문의 명예 때문이다.
이처럼 분묘 및 그 주변 산지를 놓고 일어나는 소송이 산송(山訟)이다. 산송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찾아볼 수 없고, 이웃하는 중국과 일본에도 없는 조선 후기 사회만의 특징적인 역사 현상이었다. 고문서를 유려한 요즘 말로 번역한 문장은 옛사람들의 시시비비를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달한다. 조선대 사학과 교수.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려충사(麗忠祠) 고려의 충신을 모신 사당이라는 의미
홍살문
묘
윤관 장군 묘 앞 모습의 산세
파평 윤씨 윤관 장군 묘와-청송 심씨 심지원 간의 400년 묘지 다툼 화해 종결 흔적
어린 작은 소나무 몇 그루 심어져 있는 이곳은 지난 400여 동간 청송심씨와 묘역 다툼이 있었던 지역으로
2008.04.15일 부터 2008.06.20일까지 청송 심씨가19기의 묘를 모두 다른 곳으로 이장해 간 흔적.
○ 파평 윤씨-청송 심씨 400년 묘지 다툼 종결
명문가인 파평 윤씨 윤관묘 와 청송 심씨 사이에 400년 가까이 묘지에 관한 다툼이 청송심씨 묘 이전으로 끝났다.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윤관 장군 묘역(사적 제323호)에 조성된 심지원(沈之源.1593-1662) 묘(경기도 기념물 제137호) 등 청송 심씨 조상 묘 19기 이전으로 2005년 양 문중의 후손들은 윤관 장군 묘역 내에 있는 청송 심씨 조상 묘를 이장하고 파평 윤씨 문중에서 이장에 필요한 부지 8천여㎡를 현재 위치에서 120여m 떨어진 곳에 제공하기로 합의로 끝났다고 한다.
양 문중 후손들의 대승적인 양보와 화해를 존중해 묘지 이전계획 등을 승인했고 경기도 지정 문화재인 심지원 묘에 대한 전문 발굴기관의 발굴조사를 거쳐 이장을 완료하므로서 나라의 왕도차 해결하지 못한 두 문중의 400년 묘지 다툼을 끝낸 곳이다.
이유는 양 문중 사이의 묘지 다툼은 조선 중기인 1614년 청송 심씨의 수장으로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이 윤관 장군 묘 바로 위에 부친 묘를 조성한 뒤 일대 땅을 하사받아 문중 묘역을 조성하면서 비롯됐었고 한다.
파평 윤씨 일가는 이에 반발해 100여년이 지난 1763년 윤관 장군 묘를 되찾겠다며 심지원 묘를 일부 파헤쳤고 청송 심씨 일가가 이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오랜 다툼으로 발전했고 양 문중은 모두 조선시대 왕비를 3~4명씩 배출한 대표적인 외척 가문으로 당시 임금이던 영조가 고민 끝에 두개의 묘를 그대로 받들도록 화해를 구했으나 파평 윤씨 일가가 이에 불복해 심지원 묘를 이장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매를 맞아 죽는 형을 당하는 등 원한 만 깊어졌다고 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윤관 장군의 묘와 심지원의 묘가 3m 남짓 떨어져 있는 데다 윤관 장군의 묘역에 2m 높이의 돌담이 설치돼 심지원 묘의 앞을 가리는 등 조망권과 산소 훼손문제로 후손들의 다툼이 이어져왔다. 2005년 모두 조상을 올바로 섬기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서로 원한은 없다며 극적으로 화해를 한 양 문중 측은 다소 시일이 오래 걸려 어려움이 있었지만 두 문중의 화해와 양보로 약 400년 동안 訟山 의 매듭을 지었다고 한다.
교자총/전마총
묘비와 봉분은 윤관 장군의 얼을 기르기 위하여 평소 이용하고 있었던 교자 즉 가마와, 전투에 함께하던 말을 묻었다는 것인데, 정말인지는 알수 없다.
윤시중교자총
윤시중전마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