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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어른들로부터 귀에따갑게 듣던 얘기

이런생각 저런생각

by 살메기 2012. 3. 2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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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적 어른들로부터 귀에 따갑게 듣던말이 있었다.

 

하나는 문숙공할아버지(윤관 장군)에 대한 얘기로....

우리 문중에서 영의정 같은 정승벼슬을 지낸 훌륭한 분들도 많지만

조상대대로 가장 존경받는 조상은 윤관장군이라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나중에는 문무를 겸비한 충신으로 出將入相(궁을 나서면 장수, 궁안에 들면 재상)

이었으며, 만주 여진족을 물리치고 국토를 확장한 훌륭한 분이라는 것...

   

또 하나는 청송심씨와는 혼인도 안한다거나.... 양가문은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등의 이야기다.

 

그 이유는 우리 파평윤문에서 가장 존경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조상 문숙공 할아버지(고려 윤관 장군)의 묘를 청송심씨 가문에서 파내버리고

그 바로위에 심정승 묘를 썼기 때문이라 했다.

 

옛날 어느시절인지...윤씨문중은 세가 기울어 조상묘 조차 잘 돌보지 못할때, 

세도를 하던 심씨문중에서 이를 얕보고, 묘자리가 좋은 윤관장군 묘를 없애버리고

묘갈(묘의 내력을 알려주는 비석)도 파내어 버렸는데,

그 사실이 나중에 발견되었기 때문이라 했다.     

 

윤문 史跡에 의하면, 윤관장군 묘가 실전되어 찾지를 못하고 있던중,

조상 대대로 구전되어 내려오는 말이문숙공 할아버지 묘가 파주 어디쯤 이라 하였고,

그 지역 마을사람들도 윤장군 묘 위치가 대충 어디쯤 이었다는 말을 증언해주었다고 한다.   

이러던중 마침 파주군수로 임명된 후손이 사람들을 동원하여 주변 땅을 샅샅이 파헤친 결과,

땅속에서 묘갈(묘의 유래와 위치를 알려주는 비석)이 발견되고

그제서야 전후사정을 알게되었다는 것이다.  

 

어려서는 그게 그리도 대단한 일인가 싶을 정도로 잘 이해가 안되었지만....

유고사상이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던 조선시대에서는 그럴만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과거 유교적 관습 의식보다는 서양문명이 사회를 더욱 지배하게되는 등 

여건이 변화됨에 따라, 드디어 지난 2011년에 양가 문중 대표가 전격 합의하여

우리 윤문에서는 0씨 문중에 이장할수 있는 대토 산을 제공하고 심씨문중에서는

묘를 이장하기로 타결되었다.

 

250년동안 해결하지 못한 일을 이제와서 해결한 것이다.

 

마침 그에관한 책이 나왔다니 한번 구입해 읽어볼 생각이다.    

 


김경숙 (문학동네·1만원)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간에 250년이나 끌어온 소송이 2010년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소송 원인은 묏자리였다. 파평 윤씨가에서는 조상인 고려 재상 윤관의 묘 위치를 잃어버려 옛 기록을 토대로 그의 묘를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경기도 파주에서 묘갈(墓碣·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 파편을 발견해 묘지 위치를 확인한다. 하지만 바로 위쪽에 청송 심씨 심지원의 묘가 위치해 있었다. 윤씨가에서는 심씨가에 심지원 묘의 이장을 요구했지만 심씨가에서는 이장할 수 없다고 맞선다. 양측이 한 치의 양보 없이 대립하며 조정을 어지럽히자 영조는 이들을 직접 심문해 형장을 치고 귀양까지 보냈다. 대체 이들은 무엇 때문에 왕의 진노까지 사면서 250년 동안 싸움을 계속한 것일까. 그건 유교 의식에 기반을 둔 가문의 명예 때문이다.

이처럼 분묘 및 그 주변 산지를 놓고 일어나는 소송이 산송(山訟)이다. 산송은 삼국시대고려시대에도 찾아볼 수 없고, 이웃하는 중국일본에도 없는 조선 후기 사회만의 특징적역사 현상이었다. 고문서를 유려한 요즘 말로 번역한 문장은 옛사람들의 시시비비를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달한다. 조선대 사학과 교수.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려충사(麗忠祠) 고려의 충신을 모신 사당이라는 의미

 

 

홍살문

 


 묘

 

 

 

 

 

윤관 장군 묘 앞 모습의 산세

 

 

 

 

파평 윤씨 윤관 장군 묘와-청송 심씨 심지원 간의 400년 묘지 다툼 화해 종결 흔적

 

 

어린 작은 소나무 몇 그루 심어져 있는 이곳은 지난 400여 동간 청송심씨와 묘역 다툼이 있었던 지역으로

2008.04.15일 부터 2008.06.20일까지 청송 심씨가19기의 묘를 모두 다른 곳으로 이장해 간 흔적.

 

 

 

○ 파평 윤씨-청송 심씨 400년 묘지 다툼 종결

명문가인 파평 윤씨 윤관묘 와 청송 심씨 사이에 400년 가까이 묘지에 관한 다툼이 청송심씨 묘 이전으로 끝났다.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윤관 장군 묘역(사적 제323호)에 조성된 심지원(沈之源.1593-1662) 묘(경기도 기념물 제137호) 등 청송 심씨 조상 묘 19기 이전으로 2005년 양 문중의 후손들은 윤관 장군 묘역 내에 있는 청송 심씨 조상 묘를 이장하고 파평 윤씨 문중에서 이장에 필요한 부지 8천여㎡를 현재 위치에서 120여m 떨어진 곳에 제공하기로 합의로 끝났다고 한다.

 

양 문중 후손들의 대승적인 양보와 화해를 존중해 묘지 이전계획 등을 승인했고 경기도 지정 문화재인 심지원 묘에 대한 전문 발굴기관의 발굴조사를 거쳐 이장을 완료하므로서 나라의 왕도차 해결하지 못한 두 문중의 400년 묘지 다툼을 끝낸 곳이다.

 

이유는 양 문중 사이의 묘지 다툼은 조선 중기인 1614년 청송 심씨의 수장으로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이 윤관 장군 묘 바로 위에 부친 묘를 조성한 뒤 일대 땅을 하사받아 문중 묘역을 조성하면서 비롯됐었고 한다.

 

파평 윤씨 일가는 이에 반발해 100여년이 지난 1763년 윤관 장군 묘를 되찾겠다며 심지원 묘를 일부 파헤쳤고 청송 심씨 일가가 이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오랜 다툼으로 발전했고 양 문중은 모두 조선시대 왕비를 3~4명씩 배출한 대표적인 외척 가문으로 당시 임금이던 영조가 고민 끝에 두개의 묘를 그대로 받들도록 화해를 구했으나 파평 윤씨 일가가 이에 불복해 심지원 묘를 이장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매를 맞아 죽는 형을 당하는 등 원한 만 깊어졌다고 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윤관 장군의 묘와 심지원의 묘가 3m 남짓 떨어져 있는 데다 윤관 장군의 묘역에 2m 높이의 돌담이 설치돼 심지원 묘의 앞을 가리는 등 조망권과 산소 훼손문제로 후손들의 다툼이 이어져왔다. 2005년 모두 조상을 올바로 섬기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서로 원한은 없다며 극적으로 화해를 한 양 문중 측은 다소 시일이 오래 걸려 어려움이 있었지만 두 문중의 화해와 양보로 약 400년 동안 訟山 의 매듭을 지었다고 한다.

 

 

교자총/전마총

 

 

묘비와 봉분은 윤관 장군의 얼을 기르기 위하여 평소 이용하고 있었던 교자 즉 가마와, 전투에 함께하던 말을 묻었다는 것인데, 정말인지는 알수 없다.

 

윤시중교자총

 

 

윤시중전마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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