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만 가면 마음이 포근하고 어릴적 추억이 떠올라 아스라이 옛 추억에 빠지게 됩니다.
사태말, 산시랭이, 도리미, 보광골, 산목골, 양지편....
고향을 떠올리는 단어들인데 요즘 고향의 아이들도 이런 말들을 다 알고있을지 궁금합니다.
마침 설 대목이라서 정육점들이 성업중이군요.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게.... 예전에는 조그많게 도살장이라도 있었지만 없어진지 오래인데,
어떻게 정육점들이 수십개로 늘기 시작했는지 모를일입니다.
예산군에서는 특화사업으로 현재20개정도인 정육점 수를 30개 이상으로 늘릴 예정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릴적 궉산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그 위에는 백로들이 점점이 앉아 그림같은 풍경이었지만 지금은 소나무도 백로도 다 사라지고,
산은 마치 꽁지빠진 닭 꼴이 되었습니다.
넘기가 왠지 께림칙 했던때가 있었습니다
광시냇갈을 배경으로 그림도 그리고 도시락을 먹기도 했지요.
책걸상도 없는 마루바닥에 그냥 앉아 공부하였습니다.
그 마루 틈새가 얼마나 넓던지 연필이라도 놓지면 여지없이 또르르 굴러 마루밑으로 빠지곤 하였지요.
저렇게 경사가 심한데 골프장을 만들수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산세가 마치 거미가 앉아 있는 형국이며 산소자리는 거미의 머리쯤에 해당되는데
근방에서 보기드문 명당이라 합니다.
앞산은 탄광이 있던 곳으로 탄차가 여기까지 드나들었습니다.
저 앞에 시커멓게 돌이 흘러내린데는 예전에 탄을 파내던 흔적입니다.
지금은 겨울이라 썰렁하지만 여름철에는 푸른 잎들이 그늘을 만들어
수십명이 앉아 쉴수 있어 동네의 공동 놀이터이자 쉼터로 변합니다.
내 어릴적이나 지금이나 크기는 그대로인 듯 한데,
내 손자에 손자가 태어날 때까지 그대로 남아서 마을을 지켜주길 바라봅니다
제 올리는 장소가 있고 거기에는 조그많게 장난감처럼 사기로 만든 소 돼지 염소같은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그걸 만지면 큰 일 난다고 만지지 말랬지만 난 기어코 호기심에 만보았는데 아직까지 멀쩡합니다.
도리미산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입니다.
우리 가족들의 구심점이 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할아버지는 내 국민학교 5학년때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8년전에 돌아가셔서 할아버지 곁에 누우셨습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난후 왼쪽 끝에 보이는 향나무는 내가 심었는데 저만큼이나 커버렸습니다.
사촌동생 대원이가 앞장서서 산소에 오릅니다.
할마버지 할머니 산소 상석에 새긴 글입니다. 글은 아버지께서 쓰셨습니다.
"后人 坡平尹公 諱 鎬植之墓, 配 孺人 潭陽田氏, 配 孺人 新平李氏 祔左"
(파평윤씨 후손 윤호식공의 묘. 부인 담양전씨, 부인 신평유씨 왼쪽에 합장)
할아버지께서는 담양전씨이신 할머니와 혼인하여 1남을 두신후 전씨 할머니께서 돌아가신후
신평이씨 할머니와 재혼하셔서 모두 7남매를 두셨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충남 공주 신풍에서 15세에 시집오셨는데,
그 때가 일제시대라 처녀공출 하는데 시집가면 공출 안 당한다고 해서 일찍 시집오셨다면서
너무 어린나이에 부모곁을 떠나 시집오신 것이 못내 가슴에 남는다고 말씀 하시곤 하셨습니다.
그 때는 처녀공출이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그게 정신대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홍성 금마쪽에서 바라본 대흥산 뒷모습입니다.
양지편 돌보집 일가들 모습입니다. 대밭집이라고도 했었고...
서당 훈장집이기도 하여 아버님도 어려서는 저 댁에 가서 글공부 하셨다지요
예전에는 저 뒷산에 올라 다람쥐도 잡으러 다녔고, 봄이면 진달래가 온산을 붉게 뒤덮고....
진달래 꺾으러 갔다가 용천백이한테 잡히면 죽이고 간 꺼내간다는 말을 듣고는 무서워서
한달음에 뛰어내려왔던 기억도 있고....
겨울이면 꿩 잡는다고 콩에다 구멍파서 싸이나 넣어 뿌리고 다닌 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나무도 거의 사라지고 붉은 황토흙만 보입니다.
시루절산소의 오래된 옛 비석입니다.
비문에는 "정부인 광산김씨, 가선대부 호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 윤공 탕 지묘" 라고 써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호조참판은 재무부차관 정도이고, 동지의금부사는 종2품 벼슬입니다
대련사 절 주차장에 세워둔 대흥산(서울에서는 봉수산이라고 부름)과 임존산성 등산로입니다.
높이는 해발 500m가량밖에 안되지만, 예전 후백제를 건국하려는 흑치상지가
성을 쌓고 투쟁하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합니다.
산은 그다지 높지않지만 정상에 서면 예당저수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조망이 너무 좋습니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 예당의 명물인 어죽 한그릇 드시면 정말 일품이지요
대련사 절아래 주차장에서 올려다본 느티나무입니다.
옛날 초등학교때 소풍가던날...
여기쯤에서 누군가가 옷빠시 구멍을 건드려 여러명이 쏘이고 도망가고...
여자애 하나는 왼통 옷빠시가 머리속으로 치마속으로 파고들어
거의 죽는줄 알았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대련사 절마당에있는 느티나무입니다.
수령600년이면... 조선조 초기인 3대 태종임금님이 계시던 때쯤에 심어진 나무라는 것인데
그만큼 절의 역사가 깊다는 것이겠지요.
느티나무 아래로 빼꼼이 동살미 예당저수지 상류가 보입니다
대련사 극락전입니다. 조그만 암자의 극락전 정도의 규모로 참 아담합니다.
백제시대에 세워진 절이라는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동살미 다리가 저 앞에 보입니다.
저 다리를 건너면 월송을 지나 신양으로 가는길이고,
다리를 안건너고 직진해서 가면 신대, 광시, 비봉, 청양으로 가는길입니다.
대리 보광골 저수지입니다.
서울에서는 쌍동이 저수지 또는 쌍지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나타나자 놀란 물오리 한 마리가 재빠르게 헤엄쳐
저수지 중앙쪽으로 달아나 파문을 일으킵니다.
그 뒤로는 살목산(공식명칭은 백월산)이 보입니다.
예전에는 나무가 울창했었는데 몇 년전 봄 한식날 산불이 크게 나서
광시 대흥 신양일대 나무들이 모두 타버리고 민둥산이 되었다가
이제 잡나무들이 어른 키만큼 자랐습니다.
낚시꾼들의 논산훈련로 불리는 예당저수지의 상류쪽입니다.
지금은 겨울철이라 강태공들이 많지 않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전국에서 낚시꾼들이 몰려듭니다.
좌대 하나가 외로이 놓여있는 가운데 청둥오리들만 점점이 떠있습니다.
광활한 예당저수지의 모습입니다.
둘레의 길이가 무려 100리나 된다는 대형 저수지입니다.
예당평야 일대의 농수를 공급한다고 예당저수지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동산리(시골말로 동살미)다리건너 인공 섬처럼 보이는 곳에는
버드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낚시꾼들이 많이 몰려들다보니 여기저기 좌대가 놓여있습니다.
저는 중학교때부터 여기서 낚시를 시작해서 이곳은 그야말로 저의 낚시 훈련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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